최북

세상돋보기|2019. 10. 6. 13:44

조총과 상업이 세계적으로 변화의 흐름을 일으켰다는 17세기.

영국에서는 1760년에 산업혁명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1789년 시민혁명이, 중국은 청나라는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무사정권시대가 시작되어 상업과 제조업이 발달했다.


조선은 서양의 문물을 제한적으로 중국을 통해 받아들였지만 세계적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려와 조선의 계급제도 사농공상에서 가장 천대를 받던 상업,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한양의 인구가 조선 초 십만명이었던 것에서 조선 중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한양 인구가 이십만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다.


17세기 숙종 재위기간에 태어나 49살에 거리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중인 출신 화가 최북. 그 시대에 드물게 만주와 일본을 다녀왔었다.




자존감이 강하고 칼끝처럼 날카롭고 불처럼 뜨거운 사람이었다고 하는 최북은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인화가로 꼽히는 화가이다. 더러는 조선시대의 반 고흐라고 비견되기도 하는 최북은 애꾸눈이 되었다.


붓하나로 먹고 산다하여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고 지었다고 하는 최북에게 그림을 요청한 세도가가 그림을 얻지 못하자 협박을 가하자 화가나 자신의 눈을 찔렀다고.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의 반 고흐라고 비교가 되기도 하지만 반 고흐와는 달리 최북은 이미 국수(國手)로 인정을 받았다.

시, 서, 화 능했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鶉:메추라기) 최메추라기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최북의 그림은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하다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손가락으로 꽃게와 갈대를 그린 그림은 손가락만으로 그린 것을 지두화(指頭畵)라고 한다. 청나라의 화법으로 그린 것.



최북의 작품에서 명작으로 꼽히는 공산무인도는 중국 북송 때 시인 소동파의 "빈산에 사람은 없고 물 흐르고 꽃 피네."라는 시구에 답하는 그림이다.

빈틈없어 보이는 최북의 마음에는 술에 취해 흐릿해보이는 세상보다 안식을 취하고 싶었던 그 어떤 곳이 아니었을까.



최산수라고 불릴 정도의 최북의 그림에는 중국의 화풍에 구애되지 않고 조선의 풍경을 자유스럽게 묘사하며 시원하고 호방한 선이 남아 있다.



 

최북이 무주사람이라 무주에 가면 최북미술관에 그의 일생과 그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무주에 여행을 가게되면 한 번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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