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목사

세상돋보기|2019. 12. 25. 12:26

“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살겠다”


손정도 목사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의 주역이자 만주 지린 한인 사회의 ‘아버지‘였던 손정도 목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24일 KBS 1TV는 성탄 특집 임시정부 100년 기획(2부작)으로 ‘걸레성자 손정도’편을 방송했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1882-1931)는 상하이 임시정부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한 뒤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 활동 이전부터 안창호와 친분이 깊었다. 안창호와 흥사단을, 박은식과 대한교육회를 조직하는데 각각 협력했다. 또 손정도 목사는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를 백범 김구와 함께 조직했다. 

 

손정도 목사는 앞에 나서고 공로를 챙기기보다 스스로를 낮추며 궂은 일을 도맡고, 남을 조력하는 성품을 갖췄다. 실제로 스스로 특정 노선을 대표하지도 않았고, 갈등 조정과 화합에 힘을 썼다.

 

지린에서는 열다섯 살 소년인 김성주(훗날 김일성 북한 주석)를 돌보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손정도 목사의 이름은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손정도 목사는 1910년 감리교단 중국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하다 12년 ‘가쓰라 암살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했다는 게 일제의 주장인데, 손정도 목사는 증거도, 자백도 없는 상태에서 거주제한 1년형을 받고 전남 진도에 유배됐다.

 

유배를 마치고 풀려난 손정도 목사는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때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 폐위된 채 덕수궁에 유폐된 고종과 만나게 된다.


고종은 새로운 밀사 파견을 계획하고, 다섯번째 아들인 의친왕의 특사행을 추진할 인물로 손정도 목사를 주목한다. 손정도 목사는 이에 정동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게 된다. 이후 그의 활동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난 손정도 목사는 ‘호조(互助) 운동’에 마지막 힘을 다했다. 호조 운동은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목적은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었다.


안창호와 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는 안창호와 함께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서 토지를 매입한다. ‘호조(互助)’란, 말 그대로 ‘서로 돕는’ 자급자족의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목적은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로 삼는데 있었다. 그러나 100여호가 입주한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실패한다. 

 

그 후 고문 후유증과 지병에 시달리던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19일 오후 12시 눈을 감는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조국 독립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손원일 해군 제독과 북한에 방문한 손원태 부부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해군 제독이 되어 ‘대한 해군의 아버지’고 불리고 있다. 차남 손원태는 미국 유학 후 재미교포 의사가 됐다. 양자처럼 돌봐주고 후원한 소년 김성주는 북한 주석이 됐다.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 형제처럼 지내던 김일성 주석은 60년이 지난 후 북한에서 손원태와 만나게 되었다.



비단이 아닌 걸레의 삶을 선택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삶은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오늘날까지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는 단어는 주로 ‘집사, 종, 섬기는 자’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디아코노스의 어원을 따라가면 ‘먼지를 무릅쓴 채 일하고 청소하여 그곳을 빛으로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의 신념으로 걸레 철학을 주창했던 손정도 목사의 삶은 진정한 ‘디아코노스’, 걸레성자의 모습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목회 현장은 물론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들이 마다하는 궂은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손정도 목사의 행적은 역사의 어둠을 걸레처럼 닦고 닦아서 마침내 광복이라는 빛이 돌아오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날 방송은 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일흔여덟 손자의 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며 배우 겸 감독 추상미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시정부 실내를 재현한 실내 세트의 추상미 배우와 재연 드라마 장면, 다큐멘터리 부분이 교차하면서 전개됐다. 내레이터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에게 사건의 전개와 맥락을 요약적으로 소개하는 가이드 역할을 했다.


추상미는 올해 48세로 1994년 연극 '로리타'로 데뷔했으며 이후 영화감독으로 진출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서 본인이 직접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감독을 병행한 작품을 찍었다. 아버지는 배우 고 추송웅, 작은 오빠는 배우 추상록이며, 조카 또한 배우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상미 남편 이석분은 올해 나이 48세로 1996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두 사람은 지난 2007년 결혼, 슬하에 아들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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